<?xml version="1.0" encoding="utf-8"?>
<rss version="2.0">
<channel>
<title>이만우 블로그</title>
<link>http://maanu.net/soojung</link>
<description>나빌레라의 시니컬하게 세상살기</description>
<copyright></copyright>
<pubDate>Sun, 05 Sep 2010 15:37:39 +0900</pubDate>
<generator>soojung 0.4.13</generator>

<item>
<title>선과악이 대립하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title>
<link>http://maanu.net/soojung/entry.php?blogid=485</link>
<pubDate>Sat, 19 Jun 2010 23:32:50 +0900</pubDate>
<category>나의 뻘소리</category>
<description>절대선(絶對善)이라는 것이 존재 할까? 마찬가지로 절대악(絶對惡)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lt;br /&gt;
&lt;br /&gt;
인류의 많은 문학 작품들, 영화, 연극에서 독자나 관객이 주인공에게 몰입하도록 만드는 아주 좋은 도구가 바로 주인공에게는 절대선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그 대립 인물에게는 절대 악의 이미지를 주는 방식이다. 문학 작품을 읽거나 영화, 연극을 관람할 수 있는 수준의 교육을 받은 인간이라면 교육과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선(善)이라는 관념에 대해 어느 정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공통의 비슷한 인식을 주인공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악(惡)에 대해서도 대중은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주인공의 상대 인물에게 부여한다.&lt;br /&gt;
&lt;br /&gt;
선과 악의 분명한 인물 대립은 작품의 구성을 간결하고 단순하게 하며 독자와 관객에게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아주 많은 작품들이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많은 작품들이 이와 같은 분명한 대립구도를 채택했기 때문에 오히려 작품의 개성을 부각시키기 더 어려워져 버리는 문제가 생겼다.&lt;br /&gt;
&lt;br /&gt;
절대선이란 이미지와 절대악이란 이미지를 너무 분명하게 부여하려다 보니 작품의 개성이 메몰되어 버린것이다. 더불어 독자와 관객에게도 작품속의 인물을 그저 선과 악이란 두 가지로 구분하게 만들어 인물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주지 않는다.&lt;br /&gt;
&lt;br /&gt;
나는 절대선이나 절대악이 부여되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 주인공과 그 대비 인물에게 모두 중의적 선을 부여하고 싶다. 나에게 선이 모두에게 선이 아닐 수 있고, 반대로 모두에게 선인것이 나에게는 선이 아닐 수 있다. &lt;br /&gt;
&lt;br /&gt;
주인공은 모두에게 선이 되는 행동을 하지만 그것은 주인공에게 선이 아닐 수 있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선이 아닐 수 있다. 주인공은 모두에게 선이 되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갈등하는 것이고, 주인공의 행동이 자신에게 선이 되지 않는 그 사람은 주인공의 행동을 막아야 한다. &lt;br /&gt;
&lt;br /&gt;
주인공에게 선이 되는 행동이 모두에게 선이 아닐 수 있으며, 주인공은 본인이 가진 절대적인 이유때문에 그 행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분명이 그것은 모두에게 선이 아니며 어쩌면 악일 수도 있다. 그 행동을 막아야 하는 사람은 분명히 나타날 것이고 그사람의 행동 역시 악이 아니고 선이다.&lt;br /&gt;
&lt;br /&gt;
독자나 관객은 주인공에게 몰입해도 선이고, 상대 인물에게 몰입해도 선이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본다고 해도 이 둘은 모두 선이다. 좀 더 생각할 거리가 많아진다. 작품은 더이상 단순하지 않고 인물들은 보다 더 매력적이다. &lt;br /&gt;
&lt;br /&gt;
언젠가는 쓰고 싶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아... 삽질했다..-_-;;</title>
<link>http://maanu.net/soojung/entry.php?blogid=483</link>
<pubDate>Thu, 13 May 2010 21:50:00 +0900</pubDate>
<category>나의 뻘소리</category>
<description>원본 디렉토리: ~/original&lt;br /&gt;
작업 디렉토리: ~/work&lt;br /&gt;
&lt;br /&gt;
작업 디렉토리의 내용을 원본 디렉토리로 옮기고 작업을 시작하려 했다.&lt;br /&gt;
&lt;br /&gt;
mv * ../original -fr&lt;br /&gt;
&lt;br /&gt;
에러가 뜬다.. 응? -_-;; 아모야..&lt;br /&gt;
&lt;br /&gt;
mv * ../original -f&lt;br /&gt;
&lt;br /&gt;
또 뜨네..-_-;; 근데 에러가 좀 이상하다...&lt;br /&gt;
&lt;br /&gt;
아놔.. cp 해야 할껄 mv 했네..&lt;br /&gt;
&lt;br /&gt;
cd ../original&lt;br /&gt;
cp * ../work -fr&lt;br /&gt;
&lt;br /&gt;
헉!!!!!!! -_-;;;&lt;br /&gt;
&lt;br /&gt;
하위 디렉토리에 있는 어제 작업한거 다 날라갔다..아..... 의욕상실...</description>
</item>
<item>
<title>나는 도전하며 살아간다.</title>
<link>http://maanu.net/soojung/entry.php?blogid=473</link>
<pubDate>Thu, 19 Nov 2009 00:09:18 +0900</pubDate>
<category>나의 뻘소리</category>
<description>나는 도전을 즐긴다. 그리고 그 도전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게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내 도전을 많이 알리는 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버렸으니 스스로와의 타협으로 중간에 포기하는 확률을 줄일 수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다보니 몇가지 부작용이 생긴다. 사람들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 내가 도전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것을 비판한다는 것이다.(비난이 아니라 비판이다.) 그들 나름으로는 충고를 해주고 싶어서겠지만 간혹 빈정 상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노골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것을 대체 왜 하느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돈도 되지 않는 일을 왜 그리 열심히 하느냐고 핀잔이다.&lt;br /&gt;
&lt;br /&gt;
하지만 내 생각은 그들의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니까 도전이다.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면 그것은 도전이 아니라 그냥 하는 것이다. 정상인이 혼자 밥 먹는 것을 도전이라고 하지 않고, 일반인이 마라톤 풀 코스에 도전하는 것을 도전이라고 하는것과 같은 이치다. &lt;br /&gt;
&lt;br /&gt;
도전은 내 삶을 의미있게 해 준다.&lt;br /&gt;
도전이 없는 삶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lt;br /&gt;
나는 매일 매일 도전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기에 살아있을 수 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하나의 도전이 끝나고 또 다른 도전. 도전에 도전이 계속되다 보면 그 중에 하나는 나에게 엄청난 반대 급부를 선사해 줄 수도 있는 일이다. 아예 도전 조차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가능성 마져도 0%겠지만 나는 언제나 도전을 하기에 항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은 비록 나에게 아무런 금전적 이득을 주지 못하는 것일 지라도 그것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나는 나의 도전 덕에 미소 지을 날이 올 것이다.&lt;br /&gt;
&lt;br /&gt;
나는 긍정과 확신의 힘을 믿는다. 간혹 내 스스로의 부족함으로 인해 의심에 빠지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나의 삶에 있어서 나를 성공으로 이끄는 힘은 긍정과 확신이라고 생각한다. &lt;br /&gt;
&lt;br /&gt;
나는 언제나 나의 도전에 있어서 성공하리라는 긍정적 확신을 가지고 도전에 임한다. 내 아름다운 삶을 위해.</description>
</item>
<item>
<title>실패를 두려워한다면 성공도 할 수 없다.</title>
<link>http://maanu.net/soojung/entry.php?blogid=461</link>
<pubDate>Sat, 05 Sep 2009 15:24:03 +0900</pubDate>
<category>나의 뻘소리</category>
<description>모든 성공은 도전의 산물이다.&lt;br /&gt;
도전은 항상 실패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lt;br /&gt;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도전도 할 수 없다.&lt;br /&gt;
도전이 없다면 성공도 없다.&lt;br /&gt;
&lt;br /&gt;
도전을 준비한다.&lt;br /&gt;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책 읽기의 매너.</title>
<link>http://maanu.net/soojung/entry.php?blogid=447</link>
<pubDate>Mon, 15 Jun 2009 00:08:44 +0900</pubDate>
<category>나의 뻘소리</category>
<description>책 읽기의 매너.&lt;br /&gt;
&lt;br /&gt;
제목을 책 읽기의 매너라고 했지만 좀더 정확히는 &quot;공부를 목적으로 책 읽을 때의 매너&quot;라고 하고 싶다. 왜 그렇냐면 나는 책 읽는 것을 크게 두 가지 목적으로 나눠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유희를 위한 책 읽기고 두 번째는 공부를 위한 책 읽기다. &lt;br /&gt;
&lt;br /&gt;
유희를 위한 책 읽기는 소설, 시, 수필, 경전 등 지식의 습득보다 정신적 만족 혹은 영혼의 평안을 목적으로 하는 책 읽기를 통칭하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구분이다. 그리고 공부를 위한 책 읽기는 전공, 직업, 학술 등 자기 계발 및 학문적인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책 읽기를 통칭하겠다. 이 두 가지 책 읽기 중 공부를 위한 책 읽기에는 책을 읽는데 있어서 자세 혹은 매너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글에서 그것에 대해서 아주 기본적인 것을 말할 것이다.&lt;br /&gt;
&lt;br /&gt;
나는 전공과 직업의 특성상 아주 허접하고 어줍잖은 영어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된 원서를 많이 읽었고 읽고 있고 읽을 것이다. 그리고 영어 원서는 거의 99.9%가 공부를 위한 책 읽기다. (공부가 목적이 아닌 이상 영어로 된 책을 읽는 것은 정신이나 영혼이 피폐해 질 뿐 전혀 유희에 도움되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영어 원서 독서량의 약 세 배에서 네 배 이상의 한국어 책을 공부를 목적으로 읽는다. 나는 기술자고 내가 공부를 목적으로 책을 읽는 것은 대부분 기술을 습득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앞으로 공부를 목적으로 읽는 책은 기술 서적을 읽는다고 표현하겠다. &lt;br /&gt;
&lt;br /&gt;
기술 서적은 원서 말고도 번역서로도 많이 읽는다. 그리고 이 번역서의 절대 다수도 영어로 된 책이 번역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읽는 기술 서적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 영미권 책과 한국인 저자가 쓴 책. 번역서 역시 영미권 서적을 번역한 책이 많기 때문에 영미권 책으로 분류하겠다. 한국인 저자가 쓴 책은 한국 기술 서적이라고 칭하겠다. 영미권 기술 서적과 한국 기술 서적을 읽다 보면 두 종류간에 어떤 경향이 보인다. &lt;br /&gt;
&lt;br /&gt;
나 말고도 위에서 언급한 영미권 서적으로 공부를 하는 많은 엔지니어들은 영미권 기술 서적과 한국 기술 서적 차이에서 다들 표현이 다르고 느낀것이 다르겠지만 나와 같은 경향을 발견했거나 아니면 어렴풋이 나마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lt;br /&gt;
&lt;br /&gt;
나는 그 경향의 차이를 단적으로 불친절함과 친절함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영미권 기술 서적은 불친절하다. 한국 기술 서적은 과도하게 친절하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lt;br /&gt;
&lt;br /&gt;
리눅스 디바이스 드라이버를 설명한 두 권의 책이 있다. 한 권은 미국 오라일리사에서 출판한 &quot;Linux Device Drivers&quot; 일명 '말책'이다. 또 다른 한 권은 한국 한빛 미디어사에서 출판한 &quot;리눅스 디바이스 드라이버&quot;다. 두 책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고 사실상 같은 제목이다. 하지만 다루고 있는 주제의 범위는 &quot;Linux Device Drivers&quot;가 훨씬 넓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책의 두께는 &quot;리눅스 디바이스 드라이버&quot;가 거의 두 배 가까이 두껍다. &lt;br /&gt;
&lt;br /&gt;
&quot;Linux Device Drivers&quot;는 어떤 용어나 개념을 설명할 때 간단히 한 번만 설명하거나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 용어가 궁금한 독자는 직접 인터넷에서 검색하거나 다른 자료를 찾아야 한다. &quot;리눅스 디바이스 드라이버&quot;는 어떤 용어가 나오면 반복적이고 친절히 설명해 준다. 소스 코드의 삽입 방식도 차이가 있다. &quot;Linux Device Drivers&quot;에는 인용한 소스코드가 전체가 실려있지 않다. 모두 조각 코드로 되어 있다. 독자들은 책만 보면서 코드를 따라가면 소스코드를 완성할 수 없다. 책에서 지시하는 사이트에서 소스코드를 받아서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놓고 책과 소스코드를 보며 이해해야 한다. &quot;리눅스 디바이스 드라이버&quot;는 모든 소스코드 전문이 반복적으로 삽입되어 있다. 사실 이것때문에 책의 두께가 많이 두꺼워 졌을 것이라 생각된다.&lt;br /&gt;
&lt;br /&gt;
대표적으로 두 권의 영미권 기술 서적과 한국 기술 서적의 차이를 비교했다. 많은 반론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두 종류 기술 서적의 경향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빌려온 내 독후감이니 제발 태클은 걸지 말아주기 바란다. 아무튼 위 단락에서 봤을 때 영미권 기술 서적은 분명 한국 기술 서적보다 불친절하다. 소스코드도 다 안나와서 책만 봐서는 제대로 실습을 하거나 이해 할 수 없다. 독자가 귀찮다. 한국 기술 서적은 정말 다른것 없이 책 한권만 봐서 안의 내용을 다 설명하려고 노력한다.&lt;br /&gt;
&lt;br /&gt;
이는 두 권역의 독자들의 성향차이 때문일 것이다. 한국 독자들이 더 친절한 설명을 요구한다. 어느 정도 팔렸던 번역서를 번역한 모 역자의 말을 들어보면 원서에 없는 부가적인 설명을 추가하는 작업이 책 번역 작업에서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즉, 불친절한 기술 서적이 한국어로 바뀌면서 친절해 지는 것이다. 한국의 기술 서적을 읽는 사람들이 영미권의 사람들 보다 수준이 낮기 때문에 친절한 책을 원하는 것일까? 분명 아니다. 이는 공부를 위한 책읽기에 대하는 독자들의 자세나 매너의 문제라고 본다.&lt;br /&gt;
&lt;br /&gt;
기술 서적이라는 것은 그 주제가 어떤 것이든 책 한 권 만으로 그 책이 다루는 주제의 모든 관련 지식을 다 전달할 수 없다. 현대 과학 기술은 전 분야가 서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 권에 다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여가 선용이나 정신적 평안을 위해서 기술 서적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 스스로 공부를 다짐하고 그 책을 읽을 것이다.&lt;br /&gt;
&lt;br /&gt;
나는 공부는 스스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책은 공부를 위한 안내자일뿐 책은 선생님이 아니다. 책에는 질문이나 의문에 대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이나 의문을 풀기위한 안내 혹은 방법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책의 서술은 그 안내나 방법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만 있으면 된다. 책의 서술이 이해가 안가거나 관련 지식이 필요하다면 책을 읽는 사람은 스스로 그것을 찾아서 공부해야 한다. 책에 그것에 대한 내용이 없다고 불평하거나 저자를 욕하면 안될것이다. 저자는 신이 아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가 이 정도 일것이다하고 예측해서 어느정도의 정보를 제공해 줄수 있을지 몰라도 모든 사람의 필요를 만족시켜 줄 순 없다.&lt;br /&gt;
&lt;br /&gt;
그런 면에서 나는 영미권 기술 서적의 서술 방식을 선호한다. 어떤 주제에 대한 책을 쓴다면 그 주제에 대한 내용만 서술한다. 곁다리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다른 책을 읽든 인터넷 검색을 하든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든 그것은 독자가 할 일이지 저자가 해줄 일이 아니다. 다만 독자가 정말 귀찮아 할것 같은 것은 저자가 해준다. 주제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곧게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이것 저것 곁다리 지식 혹은 한 번 검색만으로도 찾을 수 있는 용어 설명등으로 이런 저런 간선도로를 만들다 보면 결국 고속도로 조차도 곧게 뻗어가지 못하고 삐뚤 뻬뚤해 져서 책은 주제를 잃고 방황하게 된다. &lt;br /&gt;
&lt;br /&gt;
공부를 다짐하고 책을 샀다면 그 책의 서술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특히 기술 서적을 읽는 사람들은 오로지 책만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구글(혹은 네이버?)과 함께 공부해야 한다. 모르는 용어가 나왔다고, 모르는 서술이 나왔다고 책의 내용이 부실하다고 욕할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모르는 자기 자신을 먼저 탓하라. 저자는 자신의 책을 읽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정도 지식은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세한 설명을 안한 것이다. 본인이 그 내용을 모른다면 본인은 저자가 설정한 독자보다 수준이 낮은 것이다. 수준 낮은 본인의 지식을 일차적으로 탓하고, 그런 다음 검색하라. 검색하면 답이 나온다. 그리고 이해한 다음 다시 책을 읽으라. 그렇게 한다면 조금 전까지 욕했던 책의 내용이 사뭇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권의 책을 다 읽는다면 욕하며 읽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스스로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것이 매너다. 그것이 내 생각이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나의 메모 습관 - 분산과 분류</title>
<link>http://maanu.net/soojung/entry.php?blogid=446</link>
<pubDate>Fri, 01 May 2009 17:05:44 +0900</pubDate>
<category>나의 뻘소리</category>
<description>나는 메모를 참 많이 하는 편이다. 언젠가부터 기억력과 기억용량이 현저히 감퇴되기 시작함을 느끼고 열심히 메모하기 시작했다. 메모는 기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잊기위해 하는 것이다. 메모해 놓으면 바로 잊어버려도 된다. 나중에 찾아보면 되니까.&lt;br /&gt;
&lt;br /&gt;
내가 굳이 메모의 주요성이나 유용한 점 등에 대해 떠들지 않아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메모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 알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미 메모를 열심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들은 메모를 어떻게 할까.&lt;br /&gt;
&lt;br /&gt;
메모에 특별한 규칙을 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만의 고유한 포멧을 정해서 메모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전에 가만히 내가 메모를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 생각해 봤다. 여러가지 특징이 생각났는데 그 중 가장 특이한 점이라면 메모를 꽤나 여러군데에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분산 시켜 놓은 메모를 모두 관리한다는 점이다.&lt;br /&gt;
&lt;br /&gt;
어떤 사람들은 하나의 매체에 메모를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플랭클린 플래너를 아주 열심히 사용한다. 그 친구는 모든 메모를 오로지 플랭클린 플래너에만 한다. 그래서 그 친구의 플랭클린 플래너에는 그의 거의 모든 정보가 다 들어가 있다.&lt;br /&gt;
&lt;br /&gt;
반면에 나는 메모를 여기저기에 분산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여기저기 보이는 대로 메모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체계를 가지고 메모를 분산한다. &lt;br /&gt;
&lt;br /&gt;
우선 '할 일'이다. 영어로 하면 ToDo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일정과는 다르게 특별히 날짜가 잡혀 있진 않지만 해야 할 일들을 리스트로 적어놓는 것이다. 보통 사느라 바빠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적어놓고 잘 보이는 곳에 놓는다. 예를 들면 영어단어 뭐뭐뭐 외우기, 누구누구에게 안부 전화하기, 고장난 뭐뭐 고치기 같은 것들이다. 귀찮다는 이유로 미루다 보면 결국 하지 못하게 되는 일들을 주로 적는다. 책상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수시로 보면서 시간이 나면 하나씩 처리하고 줄을 그어 지운다. 추가로 이곳에 Wish List도 적어놓고 돈 생길때 마다 하나씩 지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그 다음으로 내 블로그에 위키를 설치하고 위키에 적는다. 여기에는 언제 어디서나 컴퓨터를 쓰고 있을 때 필요한 내용이나 메모의 내용이 웹 URL과 관련이 있을 때 적어놓는다. 그래서 그 URL을 클릭하기만 하면 해당 페이지에 들어가서 내가 필요한 자료를 수시로 볼 수 있도록 해 놓는다. 그리고 컴퓨터를 쓰면서 자주 까먹는 명령어나 프로그래밍 스킬 같은것을 적어 놓아 작업 도중에 빠르게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굉장히 유용하다.&lt;br /&gt;
&lt;br /&gt;
그리고 나도 플랭클린 플래너를 사용한다. 하지만 다른 여러군데에 메모를 하므로 플래너 자체에는 메모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다. 플래너에는 그날의 할 일이나 매일 매일의 지출. 그날의 한 일을 주로 많이 적는다. 주로 일정에 대한 메모는 플래너에 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내일 모레에 강원도 양양에 있는 펜션에 놀러가는데 서울에서 팬션까지 가는 길이라든가 펜션 주인의 연락처 같은 것들이다. 물론 해당 날짜에는 '펜션에 놀러가기' 같은 일정에 관련된 메모가 당연히 있다.&lt;br /&gt;
&lt;br /&gt;
이동중이나 밖에서 혹은 자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 등 메모를 위해 수첩이나 종이를 꺼내고 볼펜을 꺼내기 곤란한 상황이면 바로 핸드폰에 메모한다. 이것은 오래전 PDA를 쓸 때부터 가지고 있던 습관이다. 핸드폰에 메모한 것들은 나중에 집에 와서 다른 매체로 많이 옮겨진다. 핸드폰은 주로 순간의 아이디어나 생각을 적기위해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나는 핸드폰을 고를 때 메모가 얼마나 편한지를 많이 따지는 편이다. &lt;br /&gt;
&lt;br /&gt;
나는 마우스 패드가 따로 없고 A4종이를 바인더에 끼워서 마우스 패드로 사용한다. 그래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알고리즘을 생각하거나 손으로 디버깅할 일이 있을 때 바로 바로 마우스 패드에 메모한다. 마우스 패드에 메모하는 것들은 거의 낙서 수준의 메모들이다. 정리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그리고 쓴다. A4용지를 다 채우면 그 앞에 다시 새 A4를 끼워 넣는다. 아무리 낙서라도 가끔 참고할 일이 있음을 경험으로 채득해서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자유롭게 쓰다가 중요하고 기록할 만한 일이라면 다른 매체에 옮긴다. &lt;br /&gt;
&lt;br /&gt;
마우스 패드에 메모한 것들이 주로 많이 이동하는 곳은 포스트 잇이다. 마우스 패드에 쓰는 메모는 거의 대부분 내가 만드는 프로그램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알고리즘에 대한 내용이나 나중에 만들 모듈에 대한 내용은 포스트 잇에 적어서 책상 앞 창문에 붙여 놓는다. (내 방 책상은 창문 바로 앞에 있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포스트 잇에 적어 놓은 부분을 처리하면 포스트 잇에 체크해서 창문 구석에 중첩해 붙여 놓는다. 나중에 프로젝트를 완료하고 나면 마우스 패드에 해당 프로젝트에 관련해서 적은것들과 함께 정리해서 화일철에 넣어 보관한다. 나중에 볼일이 없을 것 같지만 이상하게 보관하고 싶다...:)&lt;br /&gt;
&lt;br /&gt;
오프라인에서만 포스트 잇을 쓰는게 아니라 컴퓨터 안에서도 포스트 잇을 쓴다. 내가 주로 쓰는 맥북에는 '스티커'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다. 여기에는 그때 그때 생각나는 블로그 글감을 주로 쓴다. 이 글도  꽤 오래 전에 글감을 맥북 스티커에 적어 놓고 책상위의 ToDo에 적어놨던 걸 보고 노동절을 맞이하야 시간이 좀 남길래 쓰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마지막으로 업무수첩이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수첩인데 회사에서 회의에 참석하거나 세미나등을 들을 때 관련 내용을 수첩에 적는다. 물론 여기에 적는 많은 메모들도 성격에 따라 위에서 설명한 각 매체로 이동된다. 하지만 주요 용도는 회의나 세미나때 졸지않기 위함이다.&lt;br /&gt;
&lt;br /&gt;
글로 쓰다보니 꽤나 체계적으로 메모를 관리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냥 같은 성격의 오브젝트(Object)는 한 곳으로 몰아넣는 것을 좋아하는 프로그래머적 성격때문인것 같다. 이런 메모가 내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갈 까먹고서 답답해 하는 것 보단 낫다는 생각에 나는 오늘도 열심히 메모한다.&lt;br /&gt;
&lt;br /&gt;
위에서 살짝 언급했지만 이 글은 4월 5일에 떠오른 아이디어로 퇴근길에 떠오른 글감을 핸드폰에 메모했다가 집에 도착해서 그 글감을 맥북 스티커에 적어서 맥OS 1번 데스크탑에 띄워놓은걸 보고 4월 7일에 ToDo리스트에 적어 놓았었다. 그리고 4월 28일에 4월달 플래너를 정리하면서 ToDo리스트를 보고서 4월 30일 플래너의 우선업무에 적어 놨던걸 4월 30일에 5월 1일로 연기해 놓고, 오늘 플래너를 정리하다가 우선업무에 연기되어 있는 내용을 보고서 5월 1일 4시 30분부터 5시 10분까지 약 40분간 작성한 글이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나만큼 노력하지 않고는 그런 말 하지 말라.</title>
<link>http://maanu.net/soojung/entry.php?blogid=445</link>
<pubDate>Sat, 25 Apr 2009 23:21:24 +0900</pubDate>
<category>나의 뻘소리</category>
<description>졸업한지 꽤 됐지만 학교 다닐때 내가 후배들한테 많이 했던 말 중 하나가&lt;br /&gt;
&lt;br /&gt;
&quot;일단 해봐. 그냥 하면 돼&quot;&lt;br /&gt;
&lt;br /&gt;
였다. 그러면 후배녀석들 열에 아홉은 비슷한 대답을 한다.&lt;br /&gt;
&lt;br /&gt;
&quot;형은 원래 잘하잖아요.&quot;&lt;br /&gt;
&lt;br /&gt;
나는 '원래 잘한다'라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 왜냐면 난 원래 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배들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그들보다 실력면에서 앞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실력이 내가 원래 잘 하기 때문에 생긴것은 아니다.&lt;br /&gt;
&lt;br /&gt;
그 실력을 쌓기 위해 나는 그녀석들이 놀때 혹은 잘때 열심히 책보며 공부하고 코딩했다. 그녀석들이 인터넷 기사나 여기저기 게시판에서 의미없는 글 읽으며 시간보낼때 나는 여러 기술 문서를 찾아다니며 공부하고 이해하려 애썼다.&lt;br /&gt;
&lt;br /&gt;
그들은 그렇게 놀았으면서 놀았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을 가지고 나보고는 '원래 잘하잖아요'따위 말을 하며 나의 조언을 무시한다. 나는 원래 잘했기 때문에 그 일을 할 수 있고 본인들은 잘 못하기 때문에 그 일을 못한다는 논리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일을 잘 하기 위해 노력할 생각은 왜 안하는 것일까.&lt;br /&gt;
&lt;br /&gt;
얼마 전에 나는 임베디드 운영체제 제작에 대한 책을 출간했다. 그리고 한 달 전 부터는 컴파일러를 만들고 있다. 동시에 코코아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있다. 별다른 일이 없는한 퇴근후 집으로 직행해서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코코아 프로그래밍 책을 보며 한 챕터씩 실습한다. 그 이후 잠들기 전까지 삼사십분 가량은 컴파일러를 만들기 위해 설계를 하거나 코딩을 한다. 퇴근후 TV나 인터넷 게시물을 보며 히히덕 거리는 시간은 없다. &lt;br /&gt;
&lt;br /&gt;
시간이 지난 다음에 후배들 중 누군가가 코코아 프로그래밍을 할 일이 있을때 나는 역시 그에게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lt;br /&gt;
&lt;br /&gt;
&quot;일단 해봐. 그냥 하면 돼&quot;&lt;br /&gt;
&lt;br /&gt;
그러면 그 후배는 아마 또 '형은 원래 잘 하잖아요'따위 대답을 할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원래 코코아 프로그래밍을 잘 하지 않았다. 퇴근후 잠들기 전까지 몇시간 안되는 시간을 쪼개서 매일 매일 조금씩 코코아 프로그래밍을 공부한 것이다. 내가 두번째 책을 내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월래 잘 하기 때문에 컴파일러 제작에 대한 책을 내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조금씩 공부하고 프로그래밍하면서 노력했기에 두번째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이 글을 내 후배들이 과연 몇명이나 읽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후배들중 누구라도 이 글을 읽는다면 다시 한번 당부하겠다. &lt;br /&gt;
&lt;br /&gt;
놀지 말고 공부하고 코딩해라.&lt;br /&gt;
내가 공부하고 코딩하는 만큼 너희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러고도 너희들 보다 내가 더 잘 한다면 그땐 당당하게 나에게 '형은 원래 잘 하잖아요' 이러면서 개겨라. 그게 아니라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라.</description>
</item>
<item>
<title>동기 부재</title>
<link>http://maanu.net/soojung/entry.php?blogid=438</link>
<pubDate>Mon, 16 Feb 2009 03:49:32 +0900</pubDate>
<category>나의 뻘소리</category>
<description>꽤 오래전에 내 블로그에 &lt;a href=http://maanu.net/soojung/entry.php?blogid=224&gt; 동기에 관한 글&lt;/a&gt;을 올린적이 있다. 이 때와 지금이 상황이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동기 부재에 시달리고 있었던듯 하다. &lt;br /&gt;
&lt;br /&gt;
글을 쓴지 거의 3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나는 약한 의지 덕에 외부에서 역치 이상의 동기 부여를 받지 않는한 어떤일을 스스로 의지로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질질 끌면서 예정일을 훨씬 넘겨 마무리 짓거나 아니면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lt;br /&gt;
&lt;br /&gt;
외부에서 부여되는 동기중 가장 효과가 좋은것은 무엇일까? 경우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범주를 줄여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가장 확실한 효과를 주는 외부 동기 부여 기재는 무엇일까? &lt;br /&gt;
&lt;br /&gt;
단언컨데 '돈'이다. 돈만큼 확실한 프로젝트를 이끌어주는 동기 부여 수단은 찾기 힘들다. 프로젝트가 예정된 날짜를 아주 많이 넘기거나(어느 정도 넘기는 경우는 꽤 많다.) 중간에 프로젝트가 엎어져 버린다면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돈을 받지 못하거나 최악의 경우 돈을 물어줘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어떤면에서 생계와 직결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그래서 돈은 확실한 동기 부여 수단이 될 수 있다. &lt;br /&gt;
&lt;br /&gt;
돈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효과를 보는 것은 무엇일까? 불특정 다수 사람들과의 약속이라고 본다. 돈 역시 어떤 의미에서 돈을 주는 사람과의 약속이지만 그것 보다는 프로젝트가 끝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과의 약속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수 사람들과의 약속은 개인에게 은연중에 책임감을 만들어준다. 사회화 과정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자신을 뽐내고 싶어한다.(물론 겸손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무슨 프로그램을 언제까지 만들겠다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공언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 와중에 나는 그것을 못만들겠다라고 말해 버리면 그것은 책임감 없는 행동일 뿐 아니라 스스로 지키지 못할 약속을 사람들과 해 버린것이고 결국 스스로 가치를 깍아내린 행동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두렵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 사람들과의 약속 역시 훌륭한 동기 부여 수단이 될 수 있다. &lt;br /&gt;
&lt;br /&gt;
그외 특정 다수 사람들과의 약속도 동기 부여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동기 부여의 효율성이나 동기가 주는 강제성은 앞서 두 경우보다 약하다. 특정 다수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여차하면 그들과의 타협으로 동기의 강제성이 소멸되거나 약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얼마전에 어떤 개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팀으로 작업하는 것이라면 세 번째 특정다수 사람들과의 약속 정도의 동기라도 얻을 수 있겠지만 혼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것도 없다. 당연히 누구한테 돈 받고 하는 것도 아니기에 가장 강력한 동기 부여 수단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누구에게 공표하고 하는 일도 아니기에 두 번째 경우의 동기 부여 수단도 만들어 낼 수 없다. 한 마디로 동기 부재 속에서 진행이 지지부진하다. 예전 처럼 완성에 목적을 두고 완성을 위해 혼자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요즘은 스스로 잘 나오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는 만큼 내안의 열정이 식은 것인지 의지가 약해진것인지 모르겠다. 확실한것은 하고 싶으면서 하기 싫은 상태라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vim을 띄워놓고 끄지 않은채 거의 일주일 가까이 지났다. 매번 컴퓨터를 쓸 때마다 한 줄이라도 코딩해야지 하면서 vim에 커서까지 옮겨 놓지만 막상 키보드 위에 손가락이 올라가면 단 한 글자도 코딩하지 않고 생각만 하다가 결국 다른 소모적인 일들(미드 보기, 게시판질, irc질, TV프로 다운 받아보기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서도 한켠에서는 프로젝트해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뭔가 동기 부여가 필요한 시점이긴하다. 과연 무엇이 동기가 될 수 있을까.</description>
</item>
<item>
<title>인연이라는 것.</title>
<link>http://maanu.net/soojung/entry.php?blogid=435</link>
<pubDate>Sat, 17 Jan 2009 08:04:20 +0900</pubDate>
<category>나의 뻘소리</category>
<description>인연이라는 것&lt;br /&gt;
&lt;br /&gt;
인연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누구나 한번 정도는 인연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리고 사람마다 인연이라는 것을 대하는 자세는 모두 다르다. 나는 인연을 믿는다. 아니 거의 맹신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어떤식으로든 인연이 있어야만 이루어진다고 믿는다.&lt;br /&gt;
&lt;br /&gt;
인연을 인연이 계속되는 시간으로 구분해 본다면 사람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나누겠지만 나는 찰나의 인연, 짧은 인연, 긴 인연, 영원한 인연으로 나누고 싶다. &lt;br /&gt;
&lt;br /&gt;
그리고 인연을 통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존중, 배려, 기대, 공감. 이렇게 네 가지로 구분하고 싶다. &lt;br /&gt;
&lt;br /&gt;
찰나의 인연은 우리의 하루 일상 속에 수없이 마주치고 접하게 되는 인연이다. 지하철에서 스치는 사람들, 거리에서 스치는 사람들. 대개 한 번 보고 기억에서 사라지는 사람들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그런 사람들이다. 말 그대로 옷깃만 스치는 인연이다. 이런 인연은 우리 인생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우리 인생에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찰나의 인연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수준의 존중과 배려 정도면 족하다. 그들에 어떤 기대나 공감까지 가질 필요는 그다지 없다.&lt;br /&gt;
&lt;br /&gt;
짧은 인연은 사회 생활 속에서 많이 접하는 인연이다. 하는 일이나 직업적인 이유로 인해 몇 번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몇 년 정도 짧은 시간동안은 기억되겠지만 언젠가는 잊혀져 버리는 사람들이다. 주로 상호 계산적인 관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면 손님과 주인, 계약상의 갑과 을, 거래처의 담당직원 같은 사람들이다. 돈과 관련되는 사람들인 만큼 필요한 만큼의 존중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상호 계산적으로 내가 그 사람들에게 해준 만큼 나도 그 사람들로 부터 받을 것을 기대한다. Give and Take. 하지만 역시 그 사람들과 무언가 공감할 필요는 없다. &lt;br /&gt;
&lt;br /&gt;
긴 인연은 친구, 헤어진 연인, 짝 사랑 같이 언젠가는 헤어지고 다시 만날 가능성 조차 희박하지만 기억속에 내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 인생에 큰 변화를 준다. 그들과의 만남은 나를 변화시키고 나 역시 그들을 변화시킨다. 대체로 영혼의 교류를 통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 중에 인생의 동반자를 찾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내 가족만큼의 존중과 배려를 해준다. 형식적이거나 예절을 차리는 식의 배려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중과 배려다. 또한 높은 수준의 기대를 가진다. 내 친구니까 이정도는 이해 하겠지하는 기대. 사귀고 있는 동안에는 내 애인이니까 이러한것들을 해 주겠지하는 기대. 언젠가는 나를 좋아하겠지하는 기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너무 많다. 또한 그들과는 삶과 인생과 가치관에서 많은 것을 공유한다. 말이 잘 통하고 같이 보내는 시간도 많다. 하지만 사는 곳의 거리라든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맞지 않는다든지하는 물리적인 문제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 크게 싸워서 서로간의 신뢰에 금이 가는 문제 등으로 한순간에 등을 돌리게 된다. 긴 인연은 그 인연이 계속되는 시간 만큼이나 인연이 끊어지게 되는 이유나 원인도 많다.&lt;br /&gt;
&lt;br /&gt;
영원한 인연은 가족, 배우자 같은 내가 죽을 때까지 내 옆에 있어주는 인연이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함께할 수 있는 친구일 수도 있다. 이들은 내가 죽을 때까지 내 기억속에 남아있을 뿐더러 실제로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들이다. 내 삶과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고 부모님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듯이 나라는 존재가 살아있는 원동력이 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중이 아닌 무의식적인 존중이 있다. 내가 이들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한다. 같은 맥락으로 자연스러운 배려가 이뤄진다. 나는 이들을 전혀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데 그것 자체가 이들에 대한 배려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는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단지 내 옆에 있어주는 것 자체만으로 나에게 삶의 이유가 되고 힘이 되기 때문에 더이상의 기대가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삶의 많은 것을 공감하고 공유한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무슨 결정을 내리든 나를 이해하고 잘 알기 때문에 나의 결정에 최대한의 공감을 표한다. &lt;br /&gt;
&lt;br /&gt;
인연은 만들어가는 것일까, 다가오는 것일까. 찰나의 인연, 짧은 인연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도 없이 마주쳐야 하고 감내해야 하는 인연이다. 하지만 긴 인연과 영원한 인연은 내가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특히 영원한 인연은 나에게 다가온 후라도 그 인연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나 혼자 노력한다고 지켜지는 것 역시 아니다. 그만큼 영원한 인연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언제나 사람을 만날때 항상 최선을 다하고 진심으로 대한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영원한 인연이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영연한 인연을 만들어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해 본다.</description>
</item>
<item>
<title>사람은 향기로...</title>
<link>http://maanu.net/soojung/entry.php?blogid=429</link>
<pubDate>Fri, 28 Nov 2008 12:32:02 +0900</pubDate>
<category>나의 뻘소리</category>
<description>&quot;사람은 향기로 누구가를 기억한대요.&quot;&lt;br /&gt;
&lt;br /&gt;
언젠가 누군가 나와 길을 걸으며 했던 말이다. 그때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향기는 무슨. 일단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게 더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지. 그때 나는 아직 어렸었다.&lt;br /&gt;
&lt;br /&gt;
오늘 길을 걷다가 진한 커피향을 맡았다. 몇 천원짜리 고급 커피향이 아닌 몇 백원짜리 자판기 커피향이었다. 어쩌면 흔하디 흔한 커피믹스를 방금 마시고 나와 몸에 살짝 베어있는 잔향일지도 모른다. 그 순간 스치듯이 누군가 생각났다.&lt;br /&gt;
&lt;br /&gt;
얼굴도 생각나지 않고, 목소리도, 감각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같이 밥 먹고 싸구려 커피믹스 두 봉을 뜯어 커피를 나눠 마실때 나에게 전해지던 그 커피향이 떠올랐을 뿐이다. 우리는 둘이서 커피를 자주 마셨다. 까페나 커피집에서 커피를 사 마신게 아니라 그의 집 혹은 내 집에서 커피믹스를 타 마셨다. 나는 그게 편하고 좋았다. 그때 나는 여전히 어렸었다.&lt;br /&gt;
&lt;br /&gt;
&quot;향수를 써 보는건 어때? 시간이 지난 다음 너를 기억하고 싶을 때 향수가 있으면 좋을것 같아.&quot;&lt;br /&gt;
&lt;br /&gt;
그러면서 그 사람은 나에게 향수를 한 병 선물했다. 나는 지금도 그 향수를 쓰고 있다. 그를 만날때 마다 향수를 뿌리고 나갔지만 생각보다 향수는 빨리 닳지 않았다. 향수를 다 쓰기도 전에 나는 그가 선물한 향수의 향기를 그에게 전해 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향수는 나에게 있다. &lt;br /&gt;
&lt;br /&gt;
&quot;향수 좋다.&quot;&lt;br /&gt;
&lt;br /&gt;
내가 향수를 뿌리지 않고 밖에 나갔던 날에 들은 말이다. 향기는 몸에서 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옷장에 뿌려두었던 것이 옷에 베어 났던 것이었다. 그날 부터 나는 다시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단지 나에게 향수가 좋다고 했던 사람에게 계속 그 향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나는 여전히 어렸다.&lt;br /&gt;
&lt;br /&gt;
요즘은 아주 가끔 향수를 뿌리고 나간다. 뿌린다 해도 거의 향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옅게 뿌리고 나갈때 한 번 뿌리고 나면 다시 뿌리지 않는다. 덕분에 저녁때나 밤에는 몸에 향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다. 하지만 마치 습관처럼 바지 주머니에는 작은 향수병을 향수가 채워진채 넣고 다닌다.&lt;br /&gt;
&lt;br /&gt;
나도 예측하지 못하는 내 기분에 따라 어느날 주머니에 있는 향수병을 꺼내 살짝 향수를 발랐을 때 다시 누군가가 &quot;향수 좋다.&quot;라고 말해 주길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때 나는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지금도 어리다.</description>
</item>

</channel>
</rss>

